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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향리(竹香里)

죽향리의 모습

죽향리(竹香里)는 원래 옥천군 읍내면(邑內面) 저전리(楮田里)와 고증개리(高增介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옥천읍 문정리와 죽향리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 여지도서에는 읍내면 저전리에 136호, 고증개리에 42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고, 1891년 신묘장적에는 저전리에 136호, 고증개리에 40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10년 행정구역을 일제히 조정하면서 군남면과 읍내면을 합쳐 군내면이라 부르게 되면서, 저전리를 문정리와 죽향리로 나누고 고증개리는 죽향리에 합하였다. 1917년 군내면이 옥천면이 되었고, 1949년 옥천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죽향리는 이에 속해 있었다.

죽향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강점 후 여러 마을을 합쳐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 때, 마을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마을 앞에는 큰 향나무가 있다 하여 죽향리라 이름 지었다. 죽향리는 중심마을인 죽향과 탑산이골 등 두 개 자연마을로 되어 있으며 기존 자연마을 이외에 옥향아파트와 향수아파트가 건립돼 죽향1, 2, 3리로 행정구역이 분리되었다. 2007년말 현재 죽향1리에 175호, 482명, 죽향2리에 298호 1,098명, 죽향3리에 141호에 440명이 살고 있다.

조선 말엽까지 죽향리에는 관아와 시장이 있는 등 문정리, 상계리와 함께 옥천군의 중심지였다. 죽향리와 문정리 일대를 구읍이라고 부르는 것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현재의 금구리, 삼양리 등 신읍이 발전하면서 구읍지역이 쇠퇴하면서다.

전해오는 말로는 조선 말엽 죽향리에서는 크고 작은 재앙이 연이어 일어나 주민들이 매우 불안해 했는데, 동네 서쪽에 돌사람과 돌짐승을 세우면 편안해진다는 한 선비의 말을 듣고 돌사람과 돌사자를 만들어 세웠다. 이후 마을을 안정됐고, 마을 수호자 구실을 했던 돌사자 등은 2005년 도난당한 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이 돌사자가 세워져 있던 곳은 죽향리 절터로, 이곳에 있던 삼층석탑을 약 70년 전에 죽향초등학교에 옮겨다 놓았다고 전한다.
죽향리에 있는 탑산사는 500여년 전에 지었다하며 절에 있는 여근, 남근석 느티나무 두 그루는 군 보호수로 지정됐다.

근대화시기 옥천에 살던 경상도 갑부 김기태가 지었고 살았다는 한옥(현 마당넓은 집)은 오대리 보내의 한씨가 1944년 구입한 후 기증해 1964년까지 20년간 옥천여중 건물로 쓰였고, 이 한옥 옆에는 문화재 가치를 지닌 석빙고가 남아 있다. 현재 대한상공회의소 충북인력개발원은 예부터 잣나무를 많이 심어 잣밭산이라고 했던 산에 위치해 있으며, ‘가랑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가리뱅이재’로 불렸던 잣밭산 고개는 죽향리에서 군북면 용목리로 넘는 큰 고개였다.

죽향리 출신 전좌한(全佐漢, 1899∼1986)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김응선 지사와 함께 ‘서울 주요 관청 폭파 미수사건’을 주도했다. 어려서부터 항일투쟁에 나서 독립선언문을 인쇄, 살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선전하는 혈서를 붙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다 체포된 전 지사는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한 후에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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